불황 땐 물량에 맞춰 장비와 인력 다스려야 살아 남는다

정해선 동인철강 회장

2014-02-11     윤연순 기자

협궤열차에서 다짐

79년 먹고살기 빠듯하던 시절, 아버지께서 운명하시면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인천과 수원을 오갔던 수인선에 몸을 실었다. 달리는 협궤열차 안에서 한 소년은 작은 다짐을 한다. 악착같이 돈 벌어 성공하겠노라고.

수원역 인근에 위치한 벽돌공장에서 도급 일을 했다. 하루 1만원 정도의 벌이와 무엇보다 먹고 자는 걸 해결할 수 있었다. 무거운 벽돌을 지고 나르고 쌓고 하면서 온 몸은 긁히고 멍들고 성한 곳 하나 없었다. 그렇게 3년을 일했더니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고물상에서 일을 배우다

단기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면서 당시 매형이 운영하던 작은 고물상에서 시간 날 때 마다 일을 도왔다. 손으로 고철을 선별하고 옮기고 운반하는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은 편했다.

“그땐 어린 나이에 체력도 좋았지만 그동안의 고생이 몸에 배어서 웬만한 일은 무엇이든 거뜬히 해낼 자신이 있었어요. 주변 동료들도 마음이 푸근하고 순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일을 배우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고철 감 잡는데만 1년 반

84년 5월 무림상회라는 자신의 회사를 개업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자신감이 더 컸다. “흔히들 얘기하는 ‘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일을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도전해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저의 신념입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곁눈으로 일을 배울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여러가지 변수들이 튀어 나올 땐 당황도 했지만 무엇보다 같은 물건이라도 엄청난 가격차가 있다라는 걸 깨닫는데 1년 6개월이 걸렸죠. 팔기에 급급했던 고철을 모으는 장사로 변화를 시켜나갔습니다.”

그렇게 고철에 대한 감을 잡아가며 하나하나 흘려듣지 않고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길로틴 가동, 치열한 경쟁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90년도에 수원과 오산에서 영업중인 하치장 두 곳을 연달아 인수했다. “연탄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바꾸는 붐이 일면서 보일러 통을 공짜로 가져가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분들은 치워줘서 고맙고 저는 고철을 수거해 돈을 벌 수 있어 좋았죠. 그때 큰 자금을 확보하면서 하치장 두 곳을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수원과 오산의 고물상 물량 70%를 움직였다. 덩치가 커지면서 견제 세력도 나타났다. 94년 쯤 길로틴 바람이 불었다. 모 업체가 길로틴 소재 확보를 위해 바닥을 훑고 다니면서 영업에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오산에 땅을 매입해 이태리 롤링사 길로틴 600톤급을 가동했습니다. 당시도 치열한 시장경쟁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노력한 만큼 분명한 대가는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IMF위기 극복, 재도약

그에게도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97년 IMF가 터지고 한보철강마저 무너지는 불황이 급습했다.
“길로틴 할부 대금을 3개월 간격으로 3천만원씩 입금해주던 걸 환율 상승으로 두 배 금액인 6천만원까지 결제를 해줘야 했어요. 다른 건 얘기 안 해도 아실 겁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공장들이 부도를 맞으면서 원자재, 설비, 건설현장에서 고철이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리고 재도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우리업계 잘 버텨주길

99년 동인철강 법인을 내고 매제와 처남에게 수원과 오산 하치장을 각각 매각하며 회사를 재정비 했다. 2004년에는 거래하던 전자부품제조공장이 부도를 맞으면서 선급금 3억 대신 회사를 떠안았다. 다행히 한 때 50명의 직원을 둘 만큼 수익이 좋았다. 현재 삼성전자에 TV부품을 공급하며 건실하게 운영 중이다.

정 회장은 “요즘 어려운 시기인 만큼 우리업계가 잘 버텨줬으면 좋겠다”며 “장비와 인원에 맞춰 물량을 늘리지 말고 반대로 물량에 맞춰 장비와 인력을 운영해야 회사가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